누님 손등에 여린 햇살 몇 올려놓고 싶은 날입니다. 저리 환장한 봄날은 다 누구의 것일까요? 햇살 비치면 먼지도 너무 선명해 싫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너무 환한 세상에서 누구도 그런 먼지 따위는 보지도 않아요. 일요일이에요, 주저리주저리 호화롭게 소풍 가는 자동차들이 온통 길을 빼앗아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길조차 남겨두지 않았네요. 나도 오늘은 누님과 소풍을 가려고 합니다. 누님이 일하는 공장 뒷산이면 어떠냐고 하지만 난 싫어요. 어디든 그 공장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좋겠어요.누님, 기억나지요? 찔레꽃이 피었을 거에요. 날 업고 찔레 새순 벗겨주시던 누님, 쌀밥 같은 싸리꽃, 세상에내가 나 아닌 것과 다르지 않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나 아닌 것들로 나이기만 합니다. 불구의 저녁이기다리는 세월입니다.누님 손안에 한가득 흰 꽃을 담아놓고 싶은 날입니다.고봉밥처럼 담아드리고 싶습니다. 마당 넑은 옛집에도가보고 싶습니다. 담벼락 아래 화단에는 지금 무슨 꽃이 피었을까요. 담벼락을 떠받치듯 서 있던 대추나무는 안녕한지. 그 환하던 뒤란의 앵두나무는요. 이마의 주름까지 어머니를 닮아가는 누님, 머리에 흰 꽃 피고, 소풍이라도 가야 하는데, 불량이 많았나요? 공장 문은 열리지 않고요. 어째요, 저 환장한 봄날을, 저들이 다 가져가겠어요.찔레꽃 ㅡ벽제 가는 길 4 전문세상에 내가 나 아닌 것과 다르지 않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나 아닌 것들로 나이기만 합니다.나도 한때는 온전한 나로 살았을 것이다. 온전함이라는 말은 그 어느 것에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그저 나라는 본연의 실체를 흐트리지 않았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기억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한 때는가장 나다운순간들이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그것들을 까맣게 잊고있을 무렵이었다. 이승희시인의 시집을 일게 되었다.시집 한 권을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내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그런데 이승희시인의 시편들은 달랐다.호홉조차 조절해 가며 꼼짝않고 그 자리에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커다란 해성이 순식간에 나타나 사라지듯 무언가 반짝하고 지나간 듯했다.책장을 넘기다 종이에 베인 듯 한진한 아픔이 밀려왔다.그 잔상이 너무 짙어 시집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읽을 수록 그 맛과 향이 어둑한 방안을 환히 밝히고 있는 노란 모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화려하지도, 귀하지도 않은데도 그 향의 깊이는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가장 편안한 고향같은 시어들로 가득하니 말이다.물론 쓸쓸함과 적막함이 너무 깊어 시집을 읽는 내내 가슴 깊이 응어리져 있는 단단한 것들이 터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눈으로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편들을 소리내 읽다가한 편 한 편 필사를 했다.필사를 하다보니 읽을 때 놓쳤던 또 다른 귀한 감성들이 드러났다.잠깐의 여행을 가더라도 가방 속에 꼭 넣어가는 이승희시인의 시집다음 시집을 손꼽아 기다라고 있다.
1997년 시와사람 에 작품을 발표하고,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승희의 첫 시집. 가난한 시절에 대한 기억, 고단한 현실에 대한 응시 속에서 궁극적인 삶의 거소(居所)를 더듬어 찾아가는 젊은 시인의 여정이 섬세하고 투명한 목소리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오랫동안 벼려온 시인의 연장은 부정적인 곡괭이보다 긍정적인 호미 (시인 정호승)처럼 건강하고 부드럽다. 화려한 파격이나 손쉬운 초월에 기대지 않고, 경험적 충실성과 서정적 회감(回感)의 원리로 단단하고 생기 넘치는 작품들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의 시적 행보에 신뢰를 가지게 하는 첫 시집이다.
제1부
벽제 가는 길
아직은 봄이 아닌걸
바람 불어 아픈 날
찔레꽃
오늘 또 하루를
돌멩이
웃는 돌을 보았어
둥근 것들의 다른 이름
그 시절 다 갔어도
돌멩이를 쥐고
감자
감자 2
희고 붉은 감자꽃 필 때
동틀 무렵
제2부
수련
수련 2
사랑은
물방울
봄에 놀다
집에 오니 집이 없다
할머니가 컴퓨터 속으로
씨앗론
풀과 함께
식품 가게
식품 가게 2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산수유네 집에 가다
제3부
식물 기간
식물 기간 2
식물 기간 3
식물 기간 4
녹둑에서 울다
논둑에서 울다 2
그냥
호박
관계, 물들다
그날 이후
벽과 놀기
여름 나무
벽과 놀기 2
바위
나무 타는 법
제4부
공기의 집
오래된 집
나무젓가락
패랭이꽃
마포 공제회관에서 한겨레신문사까지
여름 산에서 잠들다
달
달의 집
꼭지
내가 바라보는
집, 난곡동(蘭谷洞)에서 집을 잃다
라일락 피는 그 집
푸른 연꽃
당신
해설│유성호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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